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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7. 7世 〉11. <부정공>경운각기(慶運閣記)
1. 문헌 목록 〉7. 7世 〉13. <부정공>찰방공휘지륜묘지(察訪公諱智崙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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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정공>봉렬대부참례도찰방공휘지륜묘갈명(奉列大夫參禮道察訪公諱智崙墓碣銘)
奉列大夫參禮道察訪公諱智崙墓碣銘 竊嘗見蘆沙奇先生記玉川趙氏相好亭極言其創垂深厚由篤於天倫先生正大謹嚴言必有物而所眷眷致意者如此則公之賢可知矣公諱智崙趙氏自高麗大將軍璋爲遠祖高祖諱佺封玉川府院君曾祖諱元吉 恭讓朝以定策勳至封君見麗運吿訖退居淳昌故里杜門自靖諡忠獻號農隱士林爼豆祖諱瑜號虔谷官典農寺副正時喪制廢弛類百日即吉公獨喪三年如禮我朝屢徵不起遯居順天 英陵朝旌其閭曰孝子前副正盖並褒其忠也建享祠副正二子長斯文左軍司正 贈吏曹參議次崇文兵使梅竹成公三間姑夫丙子與其子 贈敎官哲山同殉於六臣之禍諡節愍享莊陵別壇公參議出靑山鄭氏參軍尚周其外祖也公幼而岐嶷長能好學由四子五經至百家子集皆通實渉獵如誦已言梅竹公稱之曰此人可大受以薦除 寝郎遷爲參禮道察訪勸農鍊卒攻駒繕廨驛屬逋租董率曉論趁皆輸納及遞郵民頌德立石記之公志尚高古於權門要路未嘗爲趦趄足甞言人於斯世所惡者心不若人班資崇卑不足較也及斂退榮潛心古道事親極志物之養兄弟篤因心之愛時伯氏僉樞仲氏縣監季氏參判俱無故母夫人年近八耋尚無恙融融怡怡擧室在和氣中人皆艶稱及喪歛殯葬祭易戚備至朔望必展墓不以風雨或廢就府北謙川之上結一小亭扁以相好四昆季晨夕與同寝興於斯講論於斯觴詠於斯不知世間榮辱得喪之爲何事只以敎子孫引後進爲第一義常謂長不敎子弟是父兄棄子弟幼不勤學問是子弟棄其身輒嚴立課程使群子姪每日受一般子書數板史記熟讀詳誦又勉之以思索體驗日用服食務從節儉善不必由諸已好不啻自已口盖其禀質之美存養之深不可誣也乃以 弘治癸亥四月二十日考終于寝距生正統丙辰壽六十八今順天雙巖書堂洞負艮原即其藏夫人晋州河氏考剛莊公漢沒後公六年墓同瑩一男穩娶永膺大君敬老公琰女官尚瑞院直長早卒孫男察訪淑珪承義副尉淑琦忠順衛淑璟將仕郎淑瑊縣監淑瓘庶女沈煥曾孫男大楠秉節校尉以行誼聞大春出爲淑璟后蔭校尉與金河西白玉峯爲友主簿金景貞察訪張仮妻淑琦出大成與李一齋並德 贈佐郎忠成出爲淑瑊后文成安成參判金鍵參議李希天生員金震秋妻淑瓘出餘不盡述噫公家文獻重經兵燹筮仕年紀制行首尾雖不可詳上下數百年孝友也敦睦也文行也佳子賢孫世趾厥美蔚然爲南士家法又其賢士大夫所揄揚稱述不啻丁寧則公之可傳盡不待言語文字而有餘地矣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其信矣乎後孫昌駿綴拾遺事遣門秀士寅錫學洙請銘於余不容二不文辭銘曰誦詩三百用或不達公實咀嚼非傭耳目一語妙契發乎心得由是以推澤及庶物亦粤家世忠孝閥閱芝根醲派厥理孔晰相好遺風百世矜式 月城 崔益鉉 撰 봉렬대부삼례도찰방휘지륜묘갈명(奉列大夫參禮道察訪公諱智崙墓碣銘) 일찍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선생이 지은 옥천조씨 상호정(相好亭) 기문을 보니 그 분들의 독실한 천륜(天倫)을 극구 칭찬하였다. 기선생은 공명정대하고 근엄한 분이므로 반드시 증거할 만한 바가 있어 그처럼 자세하게 뜻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러니 공의 어짊을 알만하다 하겠다. 공의 휘는 지륜(智崙)인데 조씨는 고려 대장군 장(璋)을 원조(遠祖)로 삼는다. 고조 휘 전(佺)은 옥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증조 휘 원길(元吉)은 공양왕 때 정책(定策)한 훈공으로 봉군(封君)되었다. 고려의 운이 다하자 순창의 고리로 은거하여 두문불출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시호는 충헌, 호는 농은인데 사림(士林)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의 휘는 유(瑜) 호는 건곡이며 벼슬은 전농시 부정이다. 그때 상제가 문란하여 모두 一백일이면 복을 벗었는데 공만은 홀로 삼년상을 예대로 마쳤다. 李朝에서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순천으로 은거하였다. 세종께서 효자 전부정이란 정려를 내렸는데 이는 그의 충성심을 포장한 것이며 사우를 세워 제사한다. 부정공은 아들이 둘인 데 장자 사문(斯文)은 좌군사정(左軍司正)으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둘째 아들 숭문(崇文)은 병사(兵使)로 매죽헌(梅竹軒) 성삼문 공의 고모부이다. 병자년에 그의 아들 증교관(贈敎官) 철산(哲山)과 함께 사육신의 화에 순절하였는데 시호는 절민이며 장릉의 별단에서 제사한다. 공은 참의의 아들이며 외조(外祖)는 청산정씨 참군 상주(尚周)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국이 높았고 자라면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 의 글을 모두 섭렵하여 자기의 글처럼 외웠다. 이런 공을 매죽공이 칭찬하기를 「이 사람은 장래가 크게 촉망된다.」 하고는 참봉에 천거하였는데 다시 삼례도찰방으로 옮겼다. 찰방으로 있으면서 농사를 권장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한편 관청 청사를 수리하며, 역속들이 축낸 세금을 모두 내도록 효유하여 다 수납하였다. 벼슬이 갈리자 우역(郵驛)의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기렸다. 공은 뜻이 고상하여 권문세도가의 집에는 일찍이 찾아본 적이 없었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할 자는 마음이 사람 같지 않은 자이지, 벼슬의 높고 낮음은 따질 것이 못된다.」 하고는 벼슬길을 버리고 학문에 열중하고 어버이 봉양하는 뜻을 받들고 음식, 의복 등 공양을 다 갖추었다. 형제들과 매우 우애가 있었는데 그때 백씨는 첨추(僉樞)요, 중씨(仲氏)는 현감이요, 계씨는 참판이었으나 아무런 탈이 없었다. 모부인의 연세가 八순에 가까웠으나 무양(無恙)하여 그 화기애애함이 온 집안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모부인이 돌아가시자 상례를 갖추어 장례하고 슬퍼함이 지극하였고 삭망에는 반드시 묘를 찾아 갔는데 비바람이 불어도 그만두는 일이 없었다. 부(府)의 북쪽 겸천 위에다 작은 정자 하나를 지어 상호정(相好亭)이라 편액하였다. 그리고는 네 형제가 아침저녁으로 함께 기거하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며, 술을 마시며 시를 읊기도 하면서 세상의 영욕(榮辱)을 모르고 지냈다. 다만 자손을 가르치고 후손들을 이끌어 주는 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른이 되어 자제를 가르치지 않으면 이는 부형이 자제를 버리는 것이요, 어려서 학문을 힘쓰지 않으면 이는 자제가 스스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하고는 엄격한 공부과정을 정하여 여러 자질(子姪)로 하여금 매일 일반의 책을 공부 하게 하고, 자주 사기(史記)를 숙독시키는 한편 또 사색(思索)과 체험을 익히도록 하였다. 일용의 복식은 절약 검소하기를 힘써 따르고 착한 일을 반드시 자신만 행하지 아니하며 좋은 음식 또한 자기만 먹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힘쓰게 하였으니, 그 아름다운 자질과 심오한 수양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홍치(弘治) 계해년(一五○三) 四월 二十일 정침에서 고종하니 태어난 병진년부터 六十八세의 수를 누렸다. 지금 순천 쌍암 서당동(書堂洞) 부간(負艮)의 언덕에 공의 무덤이다. 부인 진주하씨(晋州河氏)는 강장공(剛莊公) 한(漢)의 따님인데 공보다 六년 후에 졸 하였는데 묘는 같은 곳이다. 아들 온(穩)은 영응대군(永膺大君) 경효공(敬孝公) 염(琰)의 딸에게 장가들어 벼슬은 상서원직장(尚瑞院直長)을 지냈으나 일찍 졸하였다. 손자는 찰방 숙규(淑珪), 승의부위(承義副尉) 숙기(淑琦), 충순위(忠順衛) 숙경(淑璟), 장사랑(將仕郎) 숙함(淑瑊), 현감 숙관(淑瓘)이다. 서녀(庶女)는 심환(沈煥)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대남(大楠)은 병절교위(秉節校尉)인데 행의가 알려졌으며 대춘(大春)은 숙경에 게 양자가서 음보(蔭補)로 교위가 되었는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공과 벗을 삼았다. 사위 주부(主簿) 김경정(金景貞)과 찰방 장급(張伋)인 데 이상은 숙기의 소생이다. 대성(大成)은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덕행이 같았는데 증좌랑(贈佐郎)이며, 충성 (忠成)은 숙함에게 출계하였고, 문성(文成)과 안성(安成)이며 사위 참판(參判) 김건(金鍵) 참의(參議)·이희천(李希天), 생원 김진추(金震秋) 이상은 숙관(淑瓘)의 소생이다. 그 밖의 사람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의 집안 문헌이 여러 차례 난리를 겪는 동안 불에 타 벼슬한 연대와 행한 행실들은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수백 년 동안 그 효우(孝友)와 돈목(敦睦), 문행(文行), 흘륭한 자손이 대대로 아름답게 이어져 울연하게 남쪽 지방 선비 집안의 가법이 되었다. 그리고 어진 사대부가 찬양하여 기록함이 이처럼 정령하니, 공의 이름은 꼭 언어나 문자(文字)로 표현하지 않아도 남음이 있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스런 일이 있다.』 하였으니 믿지 않겠는가. 후손 창준(昌駿)이 공의 유사(遺事)를 모아 엮어가지고 문중의 수사(秀士)·인석(寅 錫)·학수(學洙)를 보내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글을 못한다고 사양 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명한다. 시 삼백을 외어도 誦詩三百 더러는 달통하지 못하는데 用或不達 공은 실로 새기고 새겨 公實咀嚼 이목을 새롭게 했네 非傭耳目 한 마디 묘한 말 있으면 一語妙契 마음속에 간직하여 發乎心得 그걸 로 미루어서 由是以推 은택이 모두에게 미쳤네 澤及庶物 그 집안 대대로 亦粤家世 충효로 번창한 집안 忠孝閥閲 그 아름다운 연원 芝根醲派 천리가 밝았네 厥理孔晰 상호정의 아름다운 유풍 相好遺風 백세토록 모범일세 百世矜式 월성(月城) 최익현(崔葢鉉)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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